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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모든음악

El Eco (페루의 전통 민요) - Art Garfunkel / Mary was an only child - 안데스 음악

안데스 음악

                                 태양의 도시 마추픽추는 잉카 제국 최후의 요새였으며, 안데스 산맥 고원지대에 있어

                                         그 존재를 모르다가 1911년에 발견되었다.

El Eco (이 노래는 페루의 전통 민요입니다. 아트 가펑클이 Mary was an only child이란 제목으로 불러 히트시켰습니다.)

Art Garfunkel - Mary was an only child

 

남미 대륙의 서부를 종단하면서 북으로는 카리브 해까지, 남쪽으로는 남극 바다와 닿아 있는 안데스 산맥. 안데스 음악은 이 고원의 척박한 땅에 문명을 일구었던 인디오들의 음악이다. 콜롬비아, 에콰도르, 페루, 볼리비아, 아르헨티나, 칠레 등이 안데스 국가에 속한다.

한 나라나 민족, 지역, 또는 하나의 문화가 지켜 온 음악 전통이 담겨 있는 월드 뮤직의 대부분은 역사적인 배경에 의해 그 정서적 특징이 만들어진다. 특히 다른 문화에게 정복당한 역사를 경험한 지역의 음악은 그 ‘한(恨)의 정서’로 인해 음악적 감동의 골은 더욱 깊어진다. 신대륙 발견의 선봉에 섰던 스페인에게 찬란했던 잉카 문명을 정복당하고 고난의 역사를 살아야만 했던 인디오들의 슬픔이 짙게 배어 있는 안데스 음악 역시 그중의 하나로 세계 음악팬들에게 감동을 전해 왔다.

안데스 음악 속에 담긴 잉카의 번영과 몰락

‘하늘까지 이어지는 밭’이라는 의미를 지닌 안데스에는 잉카 문명 이전에도 수천 년에 이르는 그들만의 역사가 있었다. 기원전 페루의 고지대에 이루어졌던 차빈(Chavin) 문명이나 기하학적인 그림의 신비로움으로 유명한 나스카(Nazca) 문명 등이 안데스 지역의 역사 속에 존재했으며, 잉카(Inca) 문명은 12세기경 현재의 페루와 볼리비아 사이에 있는 티티카카 호수에서 기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안데스의 험준한 고원 지대에 꽃피웠던 이 문명들은 다른 지역의 문명과 마찬가지로 제국과 도시를 건설하고 여러 가지 신화를 남기기도 했고, 그 문화 속에서 이어져 온 민속음악의 특징들이 안데스 음악의 바탕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페루와 볼리비아의 국경 지역에 있는 티티카카(Titicaca) 호수.

안데스 음악의 배경을 이야기할 때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잉카 문명이다. 안데스 지역에 이루어진 마지막 원주민 문명이기도 하거니와, 현재 우리가 만날 수 있는 안데스 음악의 근간을 바로 잉카 제국의 번영과 몰락의 역사에서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한때 찬란한 영광을 누렸던 잉카 문명이 이루어졌던 곳은 페루와 볼리비아, 그리고 에콰도르 정도이다. 잉카 제국의 옛 수도인 쿠스코(Cuzco)는 인구가 이십만이 넘는 큰 도시였고, 15세기경부터는 본격적인 정복 사업을 시작해 콜롬비아 남부에서 칠레 북부 지역에 이르는 넓은 지역에 대제국을 건설했다.

‘잉카’는 ‘태양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가파른 고원에 계단식 밭을 일구고 살았던 인디오들은 태양을 숭배하고 대지를 위대한 어머니로 여겨 파차마마(Pachamama)라는 대지의 여신을 섬기며 살았다. 안데스의 인디오들은 특정 문자를 가지고 있지 않았기에 그들에게 음악은 가장 중요한 감성 표현의 도구였고, 역사와 문화를 담아내는 중요한 기록의 수단이기도 했다. 원래 풍류를 즐기는 사람들이어서 누구나 악기 하나쯤은 다룰 줄 알았다고 하며, 씨족 공동체를 구성하고 공동 경작을 했기에 음악은 그들의 일상생활 속에 깊이 스며들어 있었다. 다시 말해 안데스 인디오들에게 음악은 그들의 정체성이 담겨 있는 가장 중요한 문화 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이들의 이야기와 삶의 모습이 담긴 음악은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아픈 정서를 보듬게 된다.

영토의 확장과 함께 번성을 누리던 잉카 문명은 스페인으로부터 온 이방인에 의해 허무하게 몰락하고 말았다. 스페인의 군인이자 남미 대륙 원정의 선봉에 있었던 프란시스코 피사로라는 인물은 이 지역에 황금이 가득하다는 말을 듣고 1532년 200여 명에 불과한 군대를 이끌고 쿠스코로 들어갔다. 당시 잉카 제국을 다스리던 왕은 아타왈파였다. 피사로의 계략과 인디오들이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유럽의 무기는 근위병 수천 명을 순식간에 제압했고, 사로잡힌 아타왈파 왕은 어마어마한 양의 황금을 피사로에게 몸값으로 주었지만 끝내 살해당하고 말았다. 스페인이 안데스 사람들의 영혼에 준 지울 수 없는 상처는 그렇게 어이없이 시작되었다.

(왼쪽) 스페인의 정복자 프란시스코 피사로(Francisco Pizarro) 초상화.

(오른쪽) 스페인 군사들에게 붙잡히는 잉카 제국의 아타왈파(Atahualpa)

이어 정복자들은 꼭두각시 왕을 내세워 민심을 수습하려 했지만, 잉카의 혈통임을 자각한 그 왕은 안데스 깊숙이 도주해 스페인에 대항했다. 스페인의 횡포에 시달리던 많은 잉카인들이 힘을 모았지만, 물리적으로 스페인의 군대를 이겨 낼 수는 없었다. 결국 지금은 세계적인 관광지가 된 삭사이와망에서 벌어진 치열한 전투에서 수많은 잉카인의 피로 대지를 물들이며 쿠스코를 완전히 빼앗겨버렸다. 피사로가 황금을 찾아 잉카의 대지에 들어온 지 40년이 되는 1572년, 마지막 왕인 투팍 아마루(Tupac Amaru)가 처형당하면서 제국의 역사는 끝이 나고 말았다.

지금은 관광지가 된 삭사이와망(Saqsaywaman).

과거 잉카인들은 이곳에서 스페인 군대에게 대패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