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음악이야기

볼가 강에 울리는 스텐카 라진의 노래

 

                         스텐카 라진 Stenka Razin /  이연실 

                       

 

                       넘쳐넘쳐 흘러가는 볼가강물 위에 
                        스텐카라친 배 위에서 노래소리 들린다  
                        페르샤의 영화의 꿈 다시 찾은 공주의 
                        웃음 띄운 그 입술의 노랫소리 드높다  
                         
                        돈 코사크 무리에서 일어나는 아우성  
                        교만할 손 공주로다 우리들은 주린다 
                        다시 못 올 그 옛날에 볼가강은 흐르고 
                        꿈을 깨친 스텐카라친 장하도다 그 모습  

 

 

넘쳐 넘쳐 흐르는 볼가강물 위에
스텐카라친 배위에서 노래 소리 들린다.
페르샤의 영화에 꿈, 다시 찾는 공주의
웃음 띄운 그 입술에 노래 소리 들린다.

돈코샥의 무리에서 일어나는 아우성
오만할손 공주로다 우리들은 주린다.
흐느끼는 파도소리 넘치어 떠밀리고
잊지못할 주검들이 달빛되어 흐른다.

 

 

 

 

 

 


 

                       

  볼가 강에 울리는 스텐카 라진의 노래   

 

때는 1600년대 중반, 러시아 볼가 강 중류의 어느 영지에서 마름(지주에 의해 임명되어 농장이나 소작지를 관리하는 사람)으로 보이는 자가 영지의 농민들을 모아놓고 일장연설을 하고 있다.

“너희들이 날마다 무사히 살아가는 것이 다 주인 나리의 덕이다. 나리의 토지에서 일할 수 있다는 것을 행운으로 여겨야 한다. 그러니 너희들은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

마름은 마치 대단한 선심이나 쓰는 것처럼 농민들에게 말했다. 농민들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마름의 말을 건성으로 듣고 있었다. 마름은 헛기침을 ‘에헴’하면서 말을 잇는다.

“해마다 돼지 한 마리와 양 두 마리, 새끼 돼지 네 마리를 반드시 보내야 한다. 그리고 거위 한 마리와 암탉 네 마리씩을 바쳐야 한다.”


17세기 중엽, 러시아 각지에서는 이와 같은 광경을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었다. 당시 러시아에는 자유롭게 자기 토지를 경작하는 사람들은 드물었다. 대부분의 농민들은 귀족의 영지에서 일하며 하루하루를 고통스럽게 살아나가고 있었다. 그들은 쉬는 날도 없이 일년 내내 들에 나가 일을 하였다. 그러나 힘들여 수확한 농작물의 절반 이상을 지주에게 바쳐야 하였다.

귀족들은 자기 소유의 토지를 소작지와 직영지로 나눈 다음, 소작지는 농민들에게 빌려 주고 지대를 받았으며, 직영지는 소작 농민들을 동원하여 일을 시켰다. 그래서 농민들은, 한 달에 절반 정도는 귀족의 직영지에 나가서 일을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남은 시간에도 풀을 베어 거름을 만들고, 귀족 영주의 집수리를 하는 등 허드렛일을 해야 하였다.


당시 러시아 농민들의 처지는 저 유명한 고대 로마의 노예들과 별로 다를 바 없었다. 이들은 귀족의 딸이 결혼하는 데 딸려 가는 혼수품으로 취급되기도 하였다. 또한 가끔 주인이 아닌 다른 귀족들에게 살해되는 농민도 있었으나, 그 귀족이 자기 영지의 농민 한 사람을 내신 내놓으면 일이 해결될 정도였으니, 그 처지를 알만하다.

그처럼 고역 같은 생활을 견디지 못한 농민들은 귀족의 영지에서 도망치는 일이 잦았다. 러시아 남쪽 지방의 우크라이나와 돈 강 유역, 우랄 산맥 부근, 볼가 강 유역 등은 이렇게 자유를 찾아 도망쳐 나온 농민들이 무리를 이루어 떠돌아다녔다. 이들은 주인 없는 땅을 개간해서 농사를 짓거나, 근위병의 추격을 피해 배를 타고 볼가 강 물줄기를 따라 이리저리 오르내렸다.


하지만 탈출하지 못한 농민들 대부분은 여전히 황제와 영주들의 지배 아래에서 고된 노동에 시달렸다. 그럴 즈음, 러시아 농민들에게 복음과도 같은 소식이 입에서 입으로 은밀하게 전해졌다.

“스텐카 라진이 우리를 도우러 온다.”

그들은 스텐카 라진의 무용담을 이야기하며 영웅의 손길을 기다렸다. 농민들은 고달플 때나 억울한 일을 당할 때면 석양을 등지고 볼가 강의 웅대한 물줄기 거슬러 올라가는 스텐카 라진의 장엄한 모습을 상상하며, 가슴 속에 희망의 불씨를 소중하게 간직하였다.  그러면 이처럼 러시아 농민들의 가슴을 설레게 한 스텐카 라진은 어떤 인물이었을까?  

 

러시아 농민의 영웅 스텐카 라진 

 

돈 강의 하류 지방에는 ‘카자크(Kasak, Kazak)’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이를 ‘코사크’라고도 하는데 ‘자유인’을 뜻하는 터키어에서 비롯된 말이라고 한다. 이들은 러시아 각지에서 영주의 착취를 견디다 못하여 도망 나온 농민들이었다. 이들 ‘자유인’들은 숲에서 사냥을 하고, 강에서 고기를 잡으며 살아갔다. 더러 목축을 하거나 황무지를 개간하여 농사를 짓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들은 어느 누구의 지배도 허락하지 않았다. 지주나 귀족이 발붙이지 못하도록 하였고, 스스로 일하며 자유롭게 살아갔다.

그러나 이들 카자크의 자유가 완전히 보장된 것은 아니었다. 이들 주변에는 터키, 페르시아의 유목민들이 살고 있어서, 늘 이들에게 위협이 되었다. 따라서 카자크들은 생계를 준비하는 것 외에도 유목민들의 침입에 대비하여 스스로 힘을 키우는 수밖에 없었고, 그런 과정에서 이들은 강력하게 무장을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황제나 귀족들도 이들을 함부로 공격하지 못하였다.


스텐카 라진(Razin, Stepan Timofeyevich, 1630?~1671.6.16)은 바로 이들 ‘카자크’의 두목이었다. 그는 1630년경에 비교적 부유한 카자크 집안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진다. 그의 원래 이름은 ‘스테판’이었다. 어려서부터 정의감이 투철한 그는 풍족한 생활을 저버리고, 가난한 카자크들의 비참한 생활 속으로 뛰어든다. 이때부터 그는 ‘스텐카’로 불리기 시작하였다. ‘스텐카’는 ‘스테판’을 속되게 부르는 이름이었지만, 격식을 거부한 그는 스스로 어떤 이름으로 불리든 개의치 않았다.
1667년, 스텐카 라진은 카자크 중에서도 가장 가난한 무리를 별도로 모은 뒤, 그들을 이끌고 볼가 강 줄기를 따라 카스피 해 쪽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그 곳을 경유하여 우랄 강 중류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그 주변에는 ‘야이크’라는 도시가 있었다. 스텐카 라진은 그 도시를 공략하여 근위대를 무찌르고, 대상인과 귀족들에게서 많은 식량과 옷, 융단, 보석, 식기, 모피 등의 물자를 빼앗았다. 라진은 빼앗은 물건들을 쌓아놓고, 그곳에 모인 사람들을 향해 외쳤다.

“여러분은 이제 모두 자유인이오. 부자도 가난한 사람도 없으며, 모두가 형제들이오! 또한 여기 쌓여 있는 물건들은 여러분의 피와 땀으로 만들어진 것이므로 모두 여러분의 것이오.”
“와아-”
스텐카 라진의 말에 농민들은 일제히 함성을 터뜨렸다. 빼앗은 물건은 농민들에게 골고루 분배되었다. 스텐카 라진은 그곳의 농민들에게 구세주로 여겨졌고, 더 많은 농민들이 무리에 새로 가담하였다.


1667년에서 1669년에 걸쳐 스텐카 라진은 볼가 강 하류에서 카스피 해에 이르는 넒은 지역을 초토화시켰다. 그를 따르는 무리는 점점 불어났다. 그러자 문제가 생겼다. 더 많은 식량과 물자가 필요하게 된 것이다. 물자를 얻는 방법은 오로지 약탈뿐이었지만, 러시아에서는 이미 거의 모든 지역을 휩쓸고 난 뒤라서 더 이상 건질 물건이 없었다.
고심을 하던 스텐카 라진은 중대한 결단을 내렸다. 페르시아의 용맹한 유목민들과 일대 결전을 치르고 그들이 지닌 재물을 빼앗아 오기로 한 것이다. 물론 그것은 큰 위험이 따르는 일이었지만, 사기가 절정에 오른 스텐카 라진과 그의 무리는 주저하지 않고 공격에 나섰다.
“가자, 보물 창고 페르시아로!”


1670년, 스텐카 라진은 마침내 무리를 이끌고 카스피 해의 검은 물결을 가로질러 페르시아로 진격하였다. 스텐카 라진이 이끄는 카자크 무리는 역시 용맹스러웠다. 그들은 페르시아 군대와 싸워 막대한 양의 전리품을 얻을 수 있었다.
한편으로 스텐카 라진은 페르시아 유목민들과의 싸움에서 예기치 않은 성과를 얻었다. 페르시아에는 포로로 끌려가 노예가 된 러시아인들이 많았는데, 싸움에 이김으로써 많은 러시아인들을 구출하였던 것이다. 게다가 아름다운 페르시아 공주를 인질로 잡아왔는데, 스텐카 라진은 이 공주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스텐카 라진이 페르시아 군대를 혼내주었다.”
이런 소문이 러시아 농민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농민들은 통쾌해 하면서 스텐카 라진을 더욱 동경하게 되었다. 그리고 소문은 러시아뿐만 아니라 독일 등의 인접 국가에도 전해졌고, 그 과정에서 스텐카 라진의 이름은 전설적인 영웅으로 각색되었다.

영주의 지배 아래서 하루하루 고단한 삶을 영위하고 있던 러시아의 농민들은 서로 은밀하게 속삭였다.
“스텐카 라진이 이 마을에도 올 것이다. 우리를 괴롭히는 귀족들을 혼내주려고 그는 틀림없이 온다. 그가 오면 우리는 귀족과 싸우게 될 것이다.” 

 

넓게 번져가는 저항의 불씨 

 

스텐카 라진의 명성은 러시아 농민들의 가슴에 희망과 투쟁의 의지를 불어넣어 주었다. 농민들은 스텐카 라진이라는 든든한 이름을 배경으로 자발적인 봉기를 시도하였다. 그 도화선은 볼가 강 중류의 니제고로드 지역에서 타올랐다.
니제고로드에는 오도예프스키라는 귀족이 살고 있었다. 그는 엄청나게 넓은 영지를 가지고 있었고, 그가 직영하는 농장에는 3백여 명이나 되는 농민들이 나와서 일을 하였고, 추수 때가 되면 주체하기 힘들 정도로 막대한 양의 지대를 거두어들였다.

밭에 씨앗을 뿌리기에 적당한 어느 봄날이었다. 오도예프스키는 어느 농민의 밭에 자신의 직영지보다 먼저 씨앗이 부려진 것을 보고 노발대발하였다. 가장 적기에 직영지에 곡식을 심은 다음에 각자의 농지에 씨앗을 뿌려야 하는 원칙을 누군가 깨버린 것이다. 그는 당장에 모든 농민들을 모아놓고 호통을 쳤다.

“나의 직영지에 아직도 씨앗이 뿌려지지 않았는데 누가 먼저 너희들의 밭에 씨앗을 뿌렸느냐?”
농민들은 대답이 없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모두 분노를 삼키고 있었다. 오도예프스키는 한참 호통을 치다가 다시 명령하였다.
“모든 일을 중단하고 당장 나의 직영지에 씨앗을 뿌리라.”
농민들은 모두 어깨에 농기구를 메고 오도예프스키의 직영지로 몰려가서 일을 하였다. 그리고 그날 밤, 니제고로드에는 편지 한통이 발견되었다. 편지를 보낸 사람은 전설의 영웅 스텐카 라진이었다.

 

‘가난한 농민들이여! 나는 여러분과 힘을 합하여 니제고로드의 귀족과 관리들을 쳐부수려 합니다. 그리고 이미 여러분의 마을에는 카자크들이 파견되었습니다. 우리는 한 형제들이니 함께 힘을 모아 귀족과 근위대를 무찌릅시다. -여러분의 형제 스텐카 라진-’

오도예프스키의 눈을 피해 편지를 돌려 읽은 농민들은 잔뜩 흥분하였다. 성급한 농민들은 카자크의 군대에 합류할 준비를 서둘렀다.
“당장 스텐카 라진의 군대를 마중 나갑시다!”
그러나 카자크가 도착할 때까지 사태를 지켜보다가 나중에 합류하자는 주장이 더 우세하였다. 의견이 분분하던 중, 성질 급한 농민들 20여명은 카자크 군대를 맞으러 그날 밤 마을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이 사실을 알게 된 오도예프스키는 분노가 극에 달했다. 그는 하수인들을 시켜 도망친 농민들의 밭을 완전히 짓뭉개버리고는 남은 농민들에게 명령하였다.
“그들이 도망친 것은 너희들의 책임이다. 너희들이 그들의 몫까지 일하라. 어서 일을 시작하라.”
농민들은 오도예프스키의 말에 꼼짝도 하지 않고 저항의 눈길로 맞섰다. 그러자 오도예프스키는 당황하였다.
“이것들이...내 말이 안 들리느냐?”
다시 소리를 버럭 지르며 오도예프스키는 총을 든 하수인 열 명을 불렀다. 하수인들은 총으로 위협하며 농민들을 밭으로 내몰았다. 그때 나이가 제법 든 농민 한 명이 나서서 그들에게 총을 거두어 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러나 하수인들은 부탁을 들어주기는커녕, 도리어 그 농민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총에 맞은 농민은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그 광경을 본 3백여 농민들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농민들은  낫과 칼 등을 들고 하수인들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하수인들의 총을 모두 빼앗아 버렸다. 이어 농민들은 오도예프스키의 집으로 몰려갔다. 농민들의 손에는 대장간에서 급히 만든 칼과 창이 들려 있었다.
땅거미가 어스름하게 내릴 무렵 농민들과 오도예프스키의 하수인들 사이에 전면적인 싸움이 벌어졌다. 싸움은 밤새 계속되었다. 그러던 중에 스텐카 라진이 보낸 카자크들이 도착하였다. 힘을 얻은 농민들은 용맹스럽게 귀족 일가를 공격하였다. 농민들에게 쫓기던 오도예프스키는 마침내 자신의 저택 문고리에 목을 매고 자살을 하였다.


날이 밝을 무렵 농민들은 오도예프스키를 비롯한 인근 귀족들과 그 하수인들을 모조리 제거한 다음 저택의 창고 문을 열었다.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곡식과 고기, 계란 등을 마을로 옮겨 분배한 다음, 농민의 일부는 카자크 무리를 따라나섰다.
농민들의 봉기는 볼가 강 유역과 돈 강 유역으로 급속히 버져갔다. 곳곳에서 농민들은 카자크들과 함께 귀족 영주의 집을 습격하고 자신들의 신분을 옭아매고 있는 문서를 모조리 불태워버렸다. 

    

   

공주를 강물에 던져라!

 

스텐카 라진의 군대는 1만여 명으로 불어났다. 1670년, 스텐카 라진은 그를 따르는 카자크 무리들을 이끌고 볼가 강 하류에 있는 도시 아스트라한을 점령하였다. 어디를 가든 라진과 카자크 무리는 영웅 대접을 받았다. 스텐카 라진의 마음속에는 러시아 농민들에 대한 형제애가 강하게 싹터 올랐다. 이 때 라진은 잠시 자신의 행위를 돌아보게 된다.
지금까지 모험적으로 싸웠던 이유는 사실상 전리품을 얻기 위해서였다. 자신의 주변에 있는 가난한 카자크가, 도망쳐온 농민들의 굶주림을 해결해주고, 그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것으로 만족스러워하였다. 그러나 그런 방법으로 수 없이 많은 가난한 농민들을 다 구할 수가 없었다. 단순히 약탈하여 무리의 배를 채워주는 것 이상의 어떤 명분을 찾고 싶었다. 그것은 무엇일까.


고뇌에 찬 스텐카 라진의 마음속에는 이전과는 조금 다른 형태의 형제애가 생겨났다. 러시아의 모든 농민들을 지주와 관리의 억압에서 구해내고 싶었다. 말하자면 농노제 자체를 폐지하고 농민들이 자기 토지를 경작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스텐카 라진의 눈동자는 새로운 의지로 불타올랐다. 그는 무리에게 외쳤다.
“모든 농민은 우리의 형제다. 우리의 형제들을 저 악독한 영주와 간악한 관리들의 억압에서 구해내자!”
“와아!”
무리의 함성이 카스피 해의 검푸른 물결 위로 울려 퍼졌다. 드디어 ‘도적질’이 아닌, ‘반란’의 행군이 시작되었다. 스텐카 라진의 반란군은 짜리친, 사라토프, 사마라 등의 큰 도시를 차례로 굴복시켰다. 이들 대도시는 대부분 튼튼한 성으로 둘러싸여 있고 대포 같은 신형 무기로 무장되어 있었지만, 스텐카 라진의 군대는 성 안에 있는 주민들의 협조를 받아 승승장구하였다. 심지어는 성문을 지키던 수비대가 스스로 문을 열어주기도 하였다.
“스텐카 라진이 도시를 점령하면 귀족을 몰아내고 주민들의 밀린 세금과 빚을 탕감해준다.”
이런 소문이 들리자 러시아의 농민들과 도시민들, 그리고 하급 병사들은 스텐카 라진의 승리를 위해 적극적으로 협력하였다. 반란군은 거침없이 나아갔다. 그들 앞에는 어떤 적도 없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이때 한 가지 문제가 스텐카 라진의 발목을 붙들었다. 카자크 반란군의 내부에서 불만이 싹터 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바로 스텐카 라진과 사랑에 빠진 페르시아 공주 때문이었다. 카자크의 지도자 중에 공주의 오만함을 시기하던 이들이 터뜨린 불만으로 인하여 반란군의 무리는 분열될 조짐을 보였다.
사랑하는 공주가 동지들 간에 분란의 씨앗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스텐카 라진은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사랑을 택하자니 동지들이 울고, 동지를 택하자니 사랑을 버려야 했다. 고심하던 라진은 결국 혁명을 택하였다. 그리하여 볼가 강물 위에서 동지들에게 외쳤다.
“공주를 강물에 집어 던져라!”
그러나 모두들 얼어붙은 듯, 라진의 비장한 얼굴을 바라볼 뿐이었다. 라진은 다시 외쳤다.
“공주를 강물에 집어 던져라, 공주를...”
속으로 눈물을 삼키던 스텐카 라진은 차마 말을 맺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이윽고 공주의 처절한 비명 소리와 함께 ‘풍덩’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렇게 사랑하는 공주를 저 세상으로 보낸 뒤 스텐카 라진은 분위기를 수습하며 외쳤다. 
“가자, 모스크바로!”
마침내 반란군은 차르 왕조가 버티고 있는 모스크바로 향하였다. 그 소문을 들은 곳곳의 농민들도 산발적으로 모스크바로 향하였다. 러시아 전체가 반란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스텐카 라진은 살아있다. 

 

1670년 10월. 스텐카 라진이 지휘하는 반란군은 심비르스크(현재의 울리야노프스크)교외에서 황제가 보낸 정부군과 큰 싸움을 벌였다. 전투는 쉬지 않고 나흘간이나 계속되었다. 전세는 점점 스텐카 라진의 군대에 불리하게 전개되었다. 그 사이 황제의 지원군이 속속 도착하였다.
나흘 째 되는 날, 앞장서서 군대를 지휘하며 성곽을 공격하던 스텐카 라진은 적의 총탄에 맞아 머리에 큰 상처를 입고 말았다. 라진의 부상으로 주춤하는 사이 전세는 완전히 역전되었다. 외국에서 잘 훈련된 황제의 군대는 카자크와 농민들을 무자비하게 죽여였다. 살아남은 반란군의 무리는 있는 힘을 다하여 황제의 군대에 저항하였지만 결국은 역부족이었다. 황제가 보낸 진압군은 점점 강력해지는 반면 카자크와 농민군은 시간이 흐를수록 전투력이 약해졌다.


스텐카 라진은 머리에 피를 흘리며 볼가 강 하류 쪽으로 도망쳤다. 심비르스크에 남아있는 반군을 완전히 진압한 황제군은 도망친 스텐카 라진을 추격하였다. 그러나 전설의 영웅 스텐카 라진은 쉽게 붙들리지 않았다. 그는 돈 강 쪽으로 방향을 잡고 도망치다가 끝내는 카자크의 마을로 숨어들었다. 다시 카자크들을 모집하여 정부군을 반격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카자크들은 쫓기고 있는 그를 숨겨주지도 않았다. 이미 황제의 군대 쪽으로 대세가 기울고 있다는 것을 안 카자크들이 스텐카 라진을 배신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카자크들은 추격해온 진압군에게 라진이 숨은 곳을 밀고해버렸다. 그리하여 1671년 4월, 전설의 영웅 스텐카 라진은 마침내 황제의 군대에 붙잡혀서 모스크바로 호송되었다.


1671년 6월 16일, 스텐카 라진은 모스크바 광장으로 끌려 나왔다. 황제와 귀족들은 병사들에게 명령하였다.
“그 놈을 최대한 잔인한 방법으로 처형하라. 반역자의 최후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라.”
명령을 받은 병사들은 군중이 보는 앞에서 스텐카 라진의 손과 발을 차례로 잘라냈다. 광장 바닥은 그가 흘린 피로 붉게 물들었다. 구름처럼 몰려든 군중은 전설적인 영웅 스텐카 라진의 최후를 지켜보며 마음속으로 눈물을 흘렸다.

한편 스텐카 라진의 처형 소식은 곧 러시아 전역에 퍼져나갔다. 그의 도움을 기다리며 영주의 학대를 견디던 농노들은 절망하였다. 농민의 유일한 희망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그러던 중에 한 가지 소문이 산들바람처럼 러시아 농민들의 가슴을 어루만지고 지나갔다.
“스텐카 라진은 살아있다. 처형당한 것은 다른 사람이고, 그는 처형 직전에 탈출하였다. 지금은 어딘가 숨어있지만 반드시 다시 온다. 우리를 구출하러 올 것이다.”
농민들의 가슴에는 다시 한 가닥 희망이 피어올랐다. 그들은 현실이 고통스러울 때면 전설의 영웅 스텐카 라진이 오기를 기다리며 조용히 노래를 불렀다.

 

물론 스텐카 라진은 다시 오지 않았다. 그러나 스텐카 라진의 전설과 노래는 러시아 농민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그리고 스텐카 라진이 죽은 뒤 2백여 년이 지나도록 러시아 농민들은 입버릇처럼 이렇게 말했다.
“스텐카 라진은 살아있다. 러시아의 대지로 그는 다시 돌아온다.”
한편, 러시아 전통 민요 가락으로 불리는 이 노래는 오늘날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우리나라에서도 1900년대 초반에 독립군들이 즐겨 부르기 시작하였고, 1970~80년대에 와서는 민주화 운동가들의 애창곡이 되었다.

   
Don Cossack Choir - Stenka Razin 

 

 

 

 

 

 

.

▲ 바실리 수리코프, '스텐카 라진', 1906,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박물관 소장.

[Traditional] Stenka Razin (스텐카 라진)

Alexandrov Song and Dance Ensemble of the Red Army Conducted by Boris Alexandrov Don Kosakenchor Russland Moscow Festival Ensemble Marcel Nicolajevich Verhoeff

 

Ivan Rebroff (Bass)

ossipov Balalaika Orchestra (Directed by Nikolai Kalin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