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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모든음악

밀바와 문주란의 리베라이(Liebelei)

정염의 여인, 칸초네의 우상 밀바(Milva)   

 

지금까지 국내에 소개된 샹송 & 칸초네 스타들을 통털어 가장 높은 디스크 판매고를 기록하며

내한 공연 횟수도 압도적으로 많은 우리와 친숙한 가수라면 역시 밀바일 것이다.

밀바는 문자 그대로 이탈리아 칸초네의 전통적인 스타로서 전형적인 존재이다.

본명은 일바 마리아 비올가티(Ilva Maria Biolcati). 밀바의 데뷰 시절은 꾸밈이 없는 신선한 창법으로,

당시 '크레모나의 암호랑이'로 불리던 히트 제조기 '미나'의 라이벌로서 '코오로의 암표범'이라는

닉네임으로 불리었다.

 

일찍부터 칸초네라는 특수한 노래 세계에서 자라나 타고난 미모로 시종일관해서 저널리즘을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는 숱한 스캔들...데뷔하던 1959년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녀의 스타로서의 존재는 실로

오랜 명맥을 유지하면서 팬들의 끊임없는 사랑과 화제의 대상이 되고 있다.

 

지난 1972년과 ' 74년 두 차례에 걸쳐 추억의 칸초네 '축제의 노래 (Aria di festa)' '리코르다 (Ricorda)'

'리베라이 (Liebelei)'를 열창하면서 우리나라 팬들 앞에 그 모습을 보였던 매력적인 여인,

그녀는 우리들의 마음을 얼마나 설레이게 했던가?

 

이대 강당의 무대 위를 걸어나오던 그녀는 정말 굉장했었다고 한다. 틀에 잡힌 미모에 훤칠한 키, 풍만한

육체, 육감적인 정열의 입술과 여기에 붉은 머리칼이 풍기는 야성미가 합쳐져 그녀는 이미 노래를 부르기

전부터 청중들을 압도하였다고 전한다.

 

 

      그리운 이여, 다시 생각해 주세요
      만일 당신이 수많은 사람들의 미소 중에서
      오직 당신만을 위한 미소를 찾는다면
      무수한 손길 중에서
      당신만을 위한 손길을 찾는다면
      생각해 주세요
      제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타고난 음색에 에디프 피아프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드라마틱한 표현과 벨 칸토 창법으로 다듬어진 노래

'리코르다'가 정감 깊은 호소로 번져나오자, 넓디넓은 강당은 이질의 공간이 생기고 청중들은 그녀에게

완전히 매료되고 말았다 한다.

 

남국적인 관능이 터져나오는 힘찬 성량의 소유자 밀바를 '코오로의 암표범'이라고 부른다고 하니, 그것이

그녀에 대한 가장 어울리는 포현일지도 모른다. 터질 듯한 청중들의 박수 갈채와 찬사를 '암표범'다운,

약간은 교만한 듯한 자세로 답례한 뒤 몸을 뒤돌려 무대 안쪽으로 서서히 걸어들어가는 밀바의 뒷모습,

그날밤의 그녀를 직접 본 사람들은 아마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이다.

 

밀바야말로 인생을 값지게 희구하면서 시대의 애환을 끝없이 구가하는 영원한 칸초네의 우상이리라.

밀바는 북부 이탈리아의 코오로라고 하는 강변 시골에서 태어났다.

그녀가 태어난 코오로는 매년 강의 범람으로 인해 언제나 축축하고 음산한 분위기가 감도는

수전지대(水田地帶)의 빈촌이었다.

 

오래 전 우리나라에서도 공개가 되었던 실바노 망가노와 빗토리오 가스만 공연의 영화 '애정의 쌀'이나

'수전지대'라는 이탈리아 영화를 본 사람들은 아마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수전지대의 사람들은 밝은 표정은 물론이지만 지성과도 너무나 거리가 먼 사람들이다.

수전지대로 품팔이 가는 여인들의 집단생활을 묘사했던 영화에서처럼, 밀바 역시 생활의 흙탕물 속에서

꿈많은 소녀시대를 보냈다.

 

밀바가 오페라 가수의 부푼 꿈을 안고 수전지대를 떠나 RAI(이탈리아 국영 방송국)의 뉴 보이스 콩쿠르에

출전한 것은 불과 나이 16세 때, 당당히 우승을 차지하자 칸초네 가수로 뜻을 바꾸어 1959년에는 에디트

피아프의 히트 샹송 '미를르 (Milord)'를 노래해 크게 히트함으로써 일약 스타덤에 오를 수 있었다.

계속해서 1961년 처녀 출전한 산 레모 가요제에서 '서랍 속의 바다 (ll marenel cassetto)'로 3위에

입상되면서 밀바는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 했다.

 

그러나 아직도 다듬어지지 않은 시골 처녀 밀바가 코오로의 암표범이라는 애칭을 가진 대스타가 된 것은

이탈리아 귀족 출신의 멋장이 신사 마우리치오 고르니야티와의 운명적인 만남으로 비롯 되었다는 사실을

저버릴 수 없다.

 

밀바는 1960년경 당시 이탈리아 국영 텔레비전의 연출자였던 고르니야티와 처음으로 만났는데 그때 밀바가

31세, 고르니야티는 초로에 접어든 41세였다. 그러나 이 프로듀서는 한눈에 그녀가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그는 얼마를 텔레비전에 잇따라 출연 시키면서 버릇없고 촌티를 벗지 못했던 야성의 처녀 밀바에게 교양과

학식을 불어넣어주기 시작했다.

 

마치 천박하고 무식한 꽃팔이 소녀 일라이저를 다듬고 가꾸던 '마이 페어 레이디'의 언어 학자 히긴스 교수처럼..그렇게 해서 고르니야티가 완성한 것이 '코오로의 암포범'이다. 고르니야티가 밀바에게 온 정성을

쏟아 고녀의 싱싱한 매력을 끌어내어 그 결정을 칸초네의 세계에 전시한 것이다.

 

그리하여 밀바는 1961년부터 '69년까지 연 4회를 한 번도 빠짐없이 산 레모 가요제에 출전, 입상했다.

1962년 '리코르다'에서 시작된 그녀의 노래는 '비련 (Nessuno di voi)' '탱고 이탈리아노 (Tango Italiano)'

'플라멩코 록 (Flamenco rock)' '지중해의 사랑 (Mediterraneo)' '사랑의 시 (Quando 1'amore diventa

poesia)' '그토록 오랜 세월 (Da troppo tempo)' 등 잇따른 히트 송의 발표로

밀바는 칸초네 제1의 여성으로서의 지위를 확고하게 다져 놓았다

 

 

 

Milva  Liebelei

 

 

 문주란 - 리베라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