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세상의모든음악

La Chanson Des Vieux Amants(늙은 연인들의 노래) - Jacques Brel





La Chanson Des Vieux Amants
(늙은 연인들의 노래)

Sung By
Jacques Brel



Bien sur, nous eumes des orages
Vingt ans d'amour, c'est l'amour fol
Mille fois tu pris ton bagage
Mille fois je pris mon envol
Et chaque meuble se souvient
Dans cette chambre sans berceau
Des eclats des vieilles tempetes
Plus rien ne ressemblait a rien
Tu avais perdu le gout de l'eau
Et moi celui de la conquete

물론 우리에겐 태풍이 닥치지
20년간의 사랑, 그건 미친 사랑이지
넌 천번은 가방을 쌌고,
난 천번은 떠났네
요람없는 이 방의 가구는
기억하고 있다네
오래된 폭풍의 격정을
더 이상 아무것도 닮지 않았었어
넌 물의 맛을 잃어버렸고
난 매료의 맛을 잃어버렸네

Mais mon amour
Mon doux mon tendre mon merveilleux amour
De l'aube claire jusqu'a la fin du jour
Je t'aime encore tu sais je t'aime
Moi, je sais tous tes sortileges
Tu sais tous mes envoutements
Tu m'as garde de pieges en pieges
Je t'ai perdue de temps en temps
Bien sur tu pris quelques amants
Il fallait bien passer le temps
Il faut bien que le corps exulte
Finalement finalement
Il nous fallut bien du talent
Pour etre vieux sans etre adultes

그러나 내 사랑,
내 포근하고 부드럽고, 경이로운 사랑
새벽의 빛에서 해질녘까지
난 여전히 널 사랑해, 널 사랑하는걸 알고 있니?
난, 너의 모든 마법을 알고 있네
넌 내 모든 주술을 알고 있지
넌 위험으로부터 날 지켜주었어
난 가끔씩 널 잃어버려
물론 넌 몇몇 (다른) 연인들을 사로잡았고
시간은 흘러야만 했고
그 몸은 기뻐해야만 하네
마침내 마침내
우리에겐
어른이 되지 않고 늙어버리는 재주가 필요하다오
Oh, mon amour
Mon doux mon tendre mon merveilleux amour
De l'aube claire jusqu'a la fin du jour
Je t'aime encore, tu sais, je t'aime
Et plus le temps nous fait cortege
Et plus le temps nous fait tourment
Mais n'est-ce pas le pire piege
Que vivre en paix pour des amants
Bien sur tu pleures un peu moins tot
Je me dechire un peu plus tard
Nous protegeons moins nos mysteres
on laisse moins faire le hasard
on se mefie du fil de l'eau
Mais c'est toujours la tendre guerre

오, 내 사랑
그러나 내 사랑,
내 포근하고 부드럽고, 경이로운 사랑
새벽의 빛에서 해질녘까지
난 여전히 널 사랑해, 널 사랑하는걸 알고 있니?

더 많은 시간이 우리를 행진하게 하고
더 많은 시간이 우리를 고뇌하게 하네

그러나 가장 큰 위험은,
연인들을 평화롭게 살게 하는 것
물론 너는 조금 일찍 울고
나는 조금 늦게 괴로워 하지
우리는 아주 조금, 우리의 비밀을 지키고
우리는 아주 조금, 우연에 몸을 맡기지
우리는 물의 흐름을 믿지 않아
그러나 그건 언제나 부드러운 전쟁이라네 







Jacques Brel(자크 브렐)

벨기에가 낳은 샹송의 대부 자크 브렐은 1929년 4월8일
브뤼셀 북쪽에 있는 Schaerbeek 에서 태어났다.
그의 형제들과 마찬가지로 Saint-Viateur 초등학교를 다니지만
그는 그리 착한 학생은 아니었다.

그는 중국과 머나먼 세계를 꿈꾸었지만, 그의 아버지와 학업에 의해
점차로 그것들을 잊는다. Jacques의 아버지는 20여년의 세월을 콩고에서
보낸 후 작은 공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이어서 그 당시 대부분의 학교가
그렇듯이 카톨릭계인 Saint-Louis 학교로 진학하였지만, 그는 학교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열등생에 속하게 된다. 이 당시에 Stevenson, Melville,
London, Conrad, Jules Verne 등의 소설을 애독하며 상상의 세계로 여행을
떠나곤 한다. 이 때 그에게 다가온 교사가 바로 Deschamps 사제이다.
그는 Jacques를 열등생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수학등을 가르친다.

1944년 봄에 Jacques는 그의 친구와 함께 사설극단에 들어가는데,
이 때 그들의 계획에 도움을 준 것도 바로 Deschamps 사제이다.
이것이 Jacques의 연극 경력의 시발점이다.
이로써 Jacques의 아버지는 18살짜리 아들의 대학 진학을 포기한다.
후에 Brassen이 "사제 Brel" 이란 별명으로 부르게 된 것도
바로 아버지와 카톨릭의 영향 아래 성장한 탓이다

일년동안 Jacques는 모든 노력을 다하지만, 서서히 연극에 흥미를 잃고
있었다. 1947년 12월에 당시 젊은층의 운동인 la Franche Cordee 의
주창자인 Hector 와 Jeanne Bruyndonckx 를 만난다.
이 모임은 그의 모랄과 감성에 맞았고 여기서 그는 첫번째 노래를 작곡하게
되고 부르게 되며, 미래의 아내를 만나게 된다. 또한 그의 노래가사가
대부분 반은 시적이고 반은 철학적인 것도 이 모임에서의 영향이었다.
1950년 Jacques는 Miche Michielsen 과 결혼해서
1951년 첫째딸 Chantal 을 53년 둘째딸인 France 를
그리고 나중에 둘째부인으로부터 58년 Isabelle 을 낳는다.



1952년 Jacques는 la Franche Cordee의 동료들과 같이 어울리며
자주 노래를 불렀는데. Jacques는 브뤼셀에 있는 흑장미 카바레의 주인
Louis Laydu와 친하게 지냈고, Laydu에게 그가 작곡한 노래를 자주 보여줬다.
마지막곡은 제법 쓸만했고 여기서 자신이 작곡한 노래를 부르며 경력을 쌓는다.
이후로 Jacques는 자주 Paris로 가서 오디션에 응했고 여러번 떨어진다.
1953년 Jacques Canetti가 그의 재능을 알아보았고
파리의 Trois Baudets에 있는 Canetti의 극장에서 데뷰한다.

1954년 Canetti와 손잡고 첫번째 앨범을 낸다.
이 당시에 Brel의 노래는 약간 어두운 느낌이 있었고,
이 분위기에서 탈피하기 위해 누군가가 그에게 Clark Gable과 같은
멋진 콧수염을 기를 것을 제안한다. 점차 Jacques는 6~7군데의 카바레를
돌며 3~4곡의 노래를 부를수 있는 위치에 이르게 된다.
여기서의 성공이 Jacques로 하여금 그의 생에서 가장 중요한 결정을 하게
만든다. 그는 가족소유의 공장을 떠나 파리에 자리잡는다.
한편 첫번째 음반의 성공으로 그는 Sidney Bechet, Dario Moreno,
Philippe Clay, Catherine Sauvage, Poiret et Serrault,
Raymond Devos처럼 지방의 유력한 예술가로 자리잡는다.





55년도는 그에게 JOJO라 불리는 Georges Pasquier와 만나는 커다란
행운을 준 한 해였다. Jojo는 Jacques와 떨어질 수 없는 친구가 된다.
Cannetti에 의해 기획되었던 56년 7월의 Grenoble공연에서 이제 막
알제리에서 돌아온 젊은 피아니스트인 Francois Rauber를 만났고
이 둘은 금방 친해져서 둘이서 자동차 여행을 떠날 정도였다.
Rauber는 계속 Jacques의 작곡을 돕는다.

한편 Canetti는 25cm음반 시장을 점령해 나갔는데, 그는 57년
Charles Cros Academie에서 Quand on a que l'amour
그랑프리를 획득한다. 1958년에 Philips는 세번째 앨범을 제작하기로
결정하였고 이후 그의 노래는 계속 성공한다.
특히 Ne me quitte pas는 잊지못할 불후의 명곡으로 남는다.
공연도 계속 성공적이어서 한 해에 300여 회의 공연을 했던 해도 있었다.
하지만 마지막 테스트가 남아있었다. 그것은 모든 프랑스인에게 있어서
꿈의 무대라 할 l'Olympia 에서 의 공연으로 1961년 10월에 있었다.
이 때에 Edith Piaf가 Jacques에 대해서 '그는 끝까지 최선을 다할것이다.
왜냐하면 샹송은 그에게 있어 삶의 이유이기 대문이다' 라고 말했다 한다.
당연히 음악은 그에게 전부이었으므로 그는 성공한다.
1964년은 그에게 기록할만한 한해였는데, 그의 부모가 사망하였다.
또한 이 해에 l'Olympia 에서의 대성공을 기록한 해였다.
모든 관객이 서서 볼 수 밖에 없을 정도로 장내를 가득 메웠다.
이 공연에서 Brel은 관객앞에서 Amsterdam을 즉석에서 만들어내서
세상을 놀라게 했고, 이 때의 실황앨범 'l'Olympia 64'는 그해의 앨범상을
수상했고, Brel 자신은 최고가수상을 수상한다.
68년말에 그의 마지막 Album을 발표한다.
이 l'homme de la Mancha는 마치 그의 인생을 옮겨 적은 것 같았다.

그는 더 이상 가수도 코메디언도 아니었다. 주위의 사람들에게 자주 그렇게
이야기하곤 했다. 그는 어린시절의 꿈을 이루기 위해 비행기와 배에 전념한다.
1973년에는 두 달 여정의 대서양 항해를 떠나기도 했다.
74년에 요트를 사고 그 배로 멀고도 어려운 태평양 항해에 나선다.
타히티 근처에까지 가서 Hiva Oa에 있는 고갱이 묻혀 있는
묘지 근처에 집을 빌려서 산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새로운 앨범을 기다리고 있었고
드디어 1977년 가을에 Jacques는 새 앨범 준비에 들어간다.
그는 녹음을 위해 폴리네시아에서 나와 작업을 마치고 다시 되돌아 가곤 했다.
하지만 그의 건강이 점차로 약해져서 섬에서 나오는 시간이 점점 뜸해졌다.

1978년 10월 9일: 일생의 막을 내렸다.
위대한 예술가는 또 다른 위대한 예술가 - 머나먼 지구끝에서 빛에 칼라를
입히던 고갱을 만나러 떠났다. 고갱이 묻혔던 것처럼 Atuona 에 안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