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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classical...

무소르그스키 / 전람회의 그림 Bilder einer Ausstellung

 

 

Peter Mussorgsky / Bilder einer Ausstellung

 

무소르그스키 / 전람회의그림


Modest Petrovich Mussorgsky (1839~1881)


 

푸쉬킨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그림 오페라 (루슬란과 루드밀라)무대 장치를
위해 그려진 데생이다


Berliner Philharmoniker

Cond. Herbert von Karajanante

 

 

 

 

 

 


 

 

피아노곡으로 작곡된 이 곡은 라벨의 편곡에 의해 관현악 곡으로도

많이 연주되고 있습니다. 무소르그스키는 이 곡을 작곡할 때 친구인

하르트만의 유작전시회(遺作展示會)에 전시된 설계도·스케치·디자인 등에서

영감을 받아서 썼다고 합니다.  그림에 연유한 10개의 소품과

간주 전주의 역할을 하는 프롬나드 등을 더하여 카라얀과

베를린 필이 연주한 라벨의 관현악 버전을 듣습니다.

 


1. Promenade


2. Gnomus 거위


3. Promenade


4. The Old Castle 옛 성


5. Promenade


6. The Tuileries Gardens 튀를리 궁전의 정원


7. Bydlo 비도로(우마차)


8. Promenade


9. Ballet of the Chickens in Their Shells

껍질을 붙인 병아리의 발레


10. Samuel Goldenberg and Schmuyle

사뮤엘 고르덴베르그와 슈뮤일


11. The Market place at Limoges 리모주의 시장


12. The Catacombs. Sepulchrum romanum

카타콩브


13. Cum mortuis in lingua mortua

 닭다리가 붙은 움막


14. The Hut on Fowl's Legs. baba Yaga

바바야가의오두막집


15. The Great Gate of Kiev

 

 

 

 

 

친구인 급진적인 건축가 빅토르 하르트만이 1873년에 죽었을 때 무소르그스키는 크게 낙심했다. 무소르그스키와 절친했던 친구들 중에는 하르트만이라는 천재적인 건축가가 하나 있었다. 그러나 이 하르트만은 아까운 재능을 가진채 35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러자 남은 그의 친구들은 젊은 천재의 요절을 추모하는 뜻에서 1874년 하르트만이 남긴 그림들을 가지고 전람회를 열기로 했다. 이때 무소르그스키는 필생의 대작인 오페라 "보리스 고두노프"를 끝내고 많은 각고 끝에 어떻든 성공을 거둔 뒤였다. 마음이 내킬 때만 붓을 들곤하던 괴팍스러운 성격의 소유자인 무소르크스키는, 그의 천재적인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 탈출구를 찾기에 골몰하고 있었다.

35세 때의 작품으로서 원래 피아노 곡으로 작곡된 이 걸작도 무소르그스키의 생존시에는 별로 관심을 얻지 못하다가 작곡된지 12년 후에 출판되었으나, 이때는 이미 무소르그스키가 세상을 떠난 뒤였던 것이다. 무소르그스키는 생존시 단 한번도 공개적인 음악회에서 이 곡이 연주되는 것을 들어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던 것이다. 그러니 이 곡은 후에 드뷔시를 위시한 많은 인상주의 음악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주고 있다.

오늘날 이 곡이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프랑스의 작곡가 모리스 라벨이 대 지휘자인 세르게이 쿠세비츠키의 위촉을 받고 관현악 조곡으로 편곡해서 1922년 압도적인 성공을 거둔 뒤였다.

전곡은 10편의 음화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전람회장에서 진열순으로 연주된다. 먼저 보행의 주제에 의해서 시작된다. 이 보행 주세는 그 뒤에 오는 각 곡 사이에서 연주되면서 전람회장의 작품에서 작품으로 옮겨지는 보행을 나타내며 동시에 관람자를 표시하고 있다. 그리고 이 주제는 끊임없는 박자의 변화로 러시아 음악의 특성을 보여주는데, 그림 하나하나에서 받은 작곡가의 인상이 그대로 보행주제 위에도 반영된다. 

 

 

 

Musorgsky, Modest Petrovich(1839.3.21~1881.3.28) 러시아

19세기 낭만주의 음악 후반에 러시아에서는 국민 음악 운동이 일어났다.

슬라브 민족을 중심으로 하는 음악을 건설하려는 기운이 감돌았는데, 그 운동의 중심은 이른바 5인조에 의해 이루어졌다. 무소르그스키도 그 주요한 멤버 중의 한 사람이었다. 처음 그는 어머니에게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하였는데, 7세 때에 벌써 리스트의 소품을 연주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13세 때 근위 사관 학교에 입학하여 졸업 후 프레오브라젠스키 수비대에 입대하였다. 그는 군 병원에서 군의관이었던 보로딘과 알게 되었고 큐이, 발라키레프 등과도 교우를 맺었는데, 그 후로 그는 발라키레프에게 작곡을 배웠다. 22세 때 그는 군에서 떠나 음악에 전념하였는데, 1860년에 작곡한 오케스트라곡을 연주하여 호평을 받았다.

그는 친구들의 충고를 받기는 했지만, 사실 음악은 독습하다시피 하여 실력을 쌓았던 것이다.

그는 교향시 [민둥산의 하룻밤]으로 음악인으로서의 기초를 완전히 닦았다. 1863년 그는 5인의 동지들과 공동 생활을 하였는데, 2년 동안의 생활이 그의 생애를 통해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다. 그러나 그의 창작 활동이 원숙해졌을 때에 생활고로 인해 다시금 체신부의 관리가 되었다. 한 때 그는 고민한 나머지 알콜에 중독되었으나 전지 요양을 통해 다시금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갔다.

다시 그는 궁내성 산림과에 근무하면서 오페라 [보리스 고두노프]를 쓰기 시작하였다. 1871년 여름, 그의 친구인 건축가 빅토르 하르트만이 죽었는데, 그 친구가 남긴 작품의 전람회에서 받은 인상을 바탕으로 피아노 곡집 [전람회의 그림]을 작곡하였다. [보리스 고두노프]가 공연된 이후 그는 옛 친구들로부터 떠나 다른 주석에서 많은 시간을 소비하였다. 그는 관리 생활을 중지하였고 경제 상태는 더욱 악화되었다. 1881년 2월, 돌연히 발작하여 병원에 입원했다가 더 악화되어 작고하였다.

그는 5인조 중에서 가장 독창적인 작곡가였다. 거의 독학으로 공부한 그는 음악적인 천분과 러시아 민요의 표현 요소 등을 소재로 하여 가장 우리들과 친숙하고 진실한 음악을 작곡하였다. "예술은 그 자신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향하여 이야기를 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의 말이란 음악의 법칙에 따르는 것이기 때문에 음악의 연주는 감정을 높이는 데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담화와 억양을 표현하는 것이다. "라고 했다.

그는 유렵의 고전 음악의 전통에 반항하여 조금도 타협하지 않았다. 오페라 [보리스 고두노프]는 그의 대표작인데, 거기에는 사실주의와 인상주의, 표현주의의 경향을 엿볼 수 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그는 30세기 초의 서양 음악의 동향을 미리 암시해 주었다고 하겠다. 비록 그의 작곡 기교는 유치했지만 샘과 같이 솟아 나는 즉흥적인 착상과 드라마틱한 연출은 비범하며 비할 바 없는 미묘한 감각을 간결한 수단으로 표현했다. 그러나 생각한 바의 줄거리를 유기적으로 결합하여 전개시키는 재능이 부족한 것이 그의 약점이다. 그의 음악은 심도 깊은 우울함과 격렬한 정렬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 말하자면 그는 근대 러시아가 낳은 가장 독창성이 풍부하고 야성적인 현실주의 작곡가로 천품을 나타낸 작곡가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