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협궤열차에 관한 한 보고서 ]
({현대소설} 1990년 3월 발표) ' 윤후명 '
이 소설은 '자전적 사소설'의 형식으로 씌어진 소설이다. 윤후명은
이 소설을 통해서 협궤열차로 상징되는 인간의 근원적인 고독에 대
해서 절절하게 묘사하고 있다. 실제로 수인선 협궤열차에 운행하는
근처(안산)에 거주하기도 했던 작가는 협궤열차 주변풍경의 황량함
을 유려한 문체를 통해 참으로 인상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런 곳
에서 시를 쓰며 외롭게 살았으면"이라는 주인공의 발언은 '고독의
미학', 혹은 '자멸파의 미학'이라고 이름붙일 수 있는 윤후명의 독
특한 소설세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자신이 낭만주의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읽어야 할 소설이다.
협궤열차를 아는가?
협궤열차란 말 그대로 좁은 궤도라는 뜻으로, 광궤에 대응되는 말이다. 즉,
열차가 다니는 궤도에는 광궤와 협궤가 있는 것이다.
보통철길을 걸어본 사람은 알 것이다. 두 줄의 평행선 사이를 뛰어본다. 분명히,
뛰어야만 다른 쪽 레일 위에 올라설 수 있다. 이것이 광궤의 레일이다. 그런데,
협궤의 레일은 평상의 걸음걸이로 다른 쪽 레일을 딛을 수 있다. 그만큼 좁은 폭이다.
어느날 딸아이를 마중하러 이 협궤열차의 역에 나간다.
열차는 멎었는데 출발은 지연되고 있다. 딸 팀隔? 역무원과 무엇인가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래서 열차는 못 떠나고 있다.
2향(二輛)짜리 조그만 열차.
"무슨 일이니?"
"아빠, 차비를 지금 내."
"왜?"
이 꼬마열차의 역은 이제 대부분 역사(驛舍)가 텅텅 비어 있고 사무
를 보는 사람들이 없다. 그리하여 열차 안에서 표를 끊어야 한다.
"표 끊을 손님 없습니까?"
역무원이 통로를 오간다.
그 표에는 가격표시가 10, 20, 30, 40, ... 100으로 되어 있어서, 가령 120원어치 거라는 20과 100에 구멍을 뚫어 합계를 맞춘다.
그런데 딸아이는 중간에 역무원과 마주칠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딸아이와 서로 헤어진 채 사는 게 어언 3년째. 10살짜리 딸아이는
방학때면 이 작은 열차를 타고 아빠를 만나러 온다. 혼자서 인형을 들고.
언제나 뒤뚱거리는 꼬마열차의 크기는 보통기차의 반쯤 된다.
안쪽 사람과 마주보고 앉으면 서로의 숨결이 느껴진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다.
이것이 바로 수원과 인천(송도) 사이를 오가는 수인선 열차이다. 전세계에서 유일하다고도 한다.
"그거 트럭하고 부딪쳐도 넘어지겠군."누군가가 말한다. 실제로 그런 일도 있었다고 들었다.
언젠가 딸아이를 배웅하러 갔을 때, 저쯤 이미 열차는 출발하고 있었다.
"어, 어, 세워주세요!"
나는 소리쳤고 아이는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러자 열차는 저만치서 속력을 멈추면서 정거했다.
오늘도 나는 딸아이를 마중나갔다. 그러나 깜박 낮잠 때문에 도착시간은 벌써 지나 있었다.
'큰일이다.'
나는 부랴부랴 발걸음을 재촉했다. 역까지는 빨리 가야 15분.
숨을 들이쉬며 달려가자 앞에서 딸아이가 걸어오고 있었다.
별일 없었니?"
나는 달려가서 딸아이를 끌어안 年?
"별일 있정어."
"무슨 일?"
나는 겨울 추위에 빨갛게 상기된 딸아이의 볼을 쓰다듬었다.
"차비를 안 가져왔거든."
"그래서?"
나는 물었다.
"담에 갈 때 드린다고 했지
이렇게 수인선 협궤열차는 오늘도 하루에 세 번씩 다니고 있다.
언젠가 이 열차를 타고 낯선 곳으로 갔었다. 낯선 곳이라는 표현이 어색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 열차의 구간은 전부가 46.9km로서 그리 길지는 않다.
수원과 인천(송도) 구간이므로 종착역을 빼고 나머지 역이름은 어천, 야목, 사리, 일리, 고잔,
원곡, 군자, 달월, 소래, 남동 등으로 되어 있다.
이들 역 중에 어디로 갔는지를 굳이 밝히지 않겠다.
다만 그날도 딸아이를 맞으러 두 역쯤 앞으로 갔던 것이다.
나는 몇 사람이 흩어져간 황량한 역에 내려 주위를 살펴보았다.
바람이 쓸쓸하게 불고, 이렇다 할 다방, 아니 가게 하나 없는 시골역이었다.
이 이야기를 좀더 자세하게 해야 한다. 즉, 이 단선철도는 한낮에는 상행차와 하행차의 연결이
두 시간 남짓 시간차가 있어서 그 황량한 역에서 다시 오자면 두 시간 남짓
어디선가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것이다.
'어디서 시간을 보낼까?'
막막하기 짝이 없었다
나는 본래 황량한 풍경을 좋아한다. 소위 명승지라는 곳은 모든 여유있는 사람들에게 드리고 싶다.
나 자체가 그만큼 황량한 것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역 주변은 너무나 황량했다.
너무나 보잘것이 없었다.
나는 유리창에 깨지고 전구조차 빠진 역사를 둘러보다가 어디로 갈까를 생각하며 몇 발짝 걸음을 옮겨놓았다.
그때였다.
"다음 열차는 언제 있을까요?"
그 여자는 갑자기 꿈에서 나타난 듯 내 옆에 서 있었다.
" ?"
나는 그 여자를 쳐다보았다.
"여기서는 어떻게 움직일 수가 없어요. 열차시각표도 안 써져 있어요."
20대 후반쯤 되었을까?
나는 물론 그 주인 없는 역사에서 시각표니 요금표니 하는 표시들도 다 철거된 것을 보았었다.
그리고 그 여자가 나처럼 두 시간 남짓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글쎄요..."
그 여자의 얼굴이 흐려지는 것을 나는 보았다. 왜일까?
특별히 아름답다고는 할 수 없으나 어딘가 세련된 모습의 여자였다.
그런 여자가 목적지도 제대로 말하지 못하는 채 열차시각을 ??있었던 것이다.
"좋습니다. 저도 꼬치꼬치 캐묻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다음 열차는 두 시간 기다려야..."
나는 자세히 설명했다. 그리고 실은 나도 같은 처지가 되었다는 것,
이곳이 이렇게 시간 보낼 곳이 없는 줄 처음 알았다는 것 등을 덧붙였다.
그리고 우리는 곧 철길을 밟고 걷기 시작했다.
두 시간이면 나는 내 집까지도 충분히 도착할 것이었다.
미리 말했거니와 그 철길은 레일 폭뿐만 아니라 침목 폭도 좁다.
우리는 그 좁은 폭의 침목을 밟으며 마치 연인처럼 걸었다.
'어서 방학이 되어 딸아이가 이 철길로 와야지.'
나는 생각했다. 그때 그 여자가 말했다
"선생님, 눈이 와요."
그리고 팔짱을 끼었다. 정말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
멀리서 협궤열차의 또닥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딸아이가 타고 올 것이다.
몇 해 전이었을까. 경기도 서해안의 새로운 도시 안산에 이사올 것은 꿈에도 생각 못했던
그때 소래포구에서 협궤열차를 탔었다. 열차의 종착역은 수원이었지만, 그곳에 무슨 볼일이 있지는 않았다.
서울에서 소래까지 왔었고, 거기서 협궤열차가 다닌다는 말을 들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협궤열차로 수원까지 가서 다시 서울로 돌아가는 순환여행이었다.
동행의 여인과는 그 무렵 사랑에 빠지기 시작했던 사이였다.
그녀가 혼자 살고 있었던 세검정 마루턱에 가서 허름한 술집 겸 밥
집에 들러 무슨 이야기인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읊조리다가 돌아오곤 했던 시절,
그 무렵 나는 나 자신에게 한없는 권태를 느끼고 있었고 무엇인가 깨부수고 싶은 충동에 허덕이고 있었다.
겉으로는 매우 평온한, 순치된 생활이 있었다.
그러나,
내 마음속에는 항상 '그러나'가 있었다.
삶 繭?일회성이라는데 과연 내 삶은 무엇이란 말이냐, 때로는 밤새도록 이야기하고
사랑의 행위를 하고, 아무것도 먹기 싫어 웅크리고 있다가
저녁 무렵 세검정 고갯마루에서 사과 한 알로 이별을 고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곳은 사과가 떨어지면 툭 하고 소리가 나는 세상!'
목월 선생은 저승에 대해 이승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지만 내게도 그때 사과 한 알은 그처럼 절실하게 영혼과 육체에 와닿았다.
"자, 이제는 마지막으로 사과 한 알."
빨간 홍옥 한 알이 내 손에 쥐어졌다. 그러면서 그 가을은 깊어갔고
또 겨울이 지나가고 있었다.
나는 지금도 그때의 협궤열차를 기억한다. 물론 지금은 협궤열차와 매우 가까이 있어서
그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 어떤 날에는 그 열차가 저쪽 건널목을 지나면서 울리는 경적 소리를 귀기울여 듣기도 한다.
그러나 그때의 그 협궤열차만큼 내 인생에 환상으로 달린 열차는 없었다.
가을에 그 작고 낡은 열차는 어차피 노을녘의 시간대를 달리게 되어 있었다.
서해안의 노을은 어두운 보랏빛으로 오래 물들어 있고,
나문재의 선홍색 빛깔이 황량한 갯가를 뒤덮고 있다.
"저런 빛깔을 내기란 어렵다."
안산의 젊은 화가는 말한다.
나문재를 아는가?
봄철 포구에 가면 발긋발긋 물들어 있는 어린것을 뜯어다가 "나물 사가세요"하고 팔고 있다.
이것이 커가면서 다육식물처럼 통통한 초록빛 잎사귀로 자라다가 가을이 깊어가면서
선홍색으로, 자색으로 물들어 갯가를 온통 붉게 뒤덮는다. 거대한 찬피동물의 선지피를 쏟아놓은 것일까.
짙고, 아름답고, 슬프고, 섬뜩하다.
그러나 봄철의 그 나물은 보기와는 달리 지극히 맛이 없다. 분명히, 맛이 좋지 않다가 아니라 없다는 것이다.
그때 서해안의 황혼풍경에 어린 그 노을빛과 풀빛을 나는 잊지 못한다.
'이런 곳에서 시를 쓰며 외롭게 외롭게 살았으면.'
그것은 이 세상에는 없는 황량한 선경(仙境)이었다.
나는 이제껏 세파에 시달려온 지난날을 생각했다. 지나치게 '군중 속의 고독'에 시달려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는 나도 잘 알고 있었다. 삶의 진정한 의미는 어디에 있는가?
아웅다웅하는 저 세상을 버리고 자기 삶을 절대고독 속에 놓고 진실로 외롭게 살아가는 길은 없을까?
나는 지금도 이런 못된 생각으로 헛되이 시간을 보낼 때가 많다. 이런 점에서 나는,
우리들 삶에서 가장 낭비적인 싸움이라 할, 외로움과의 싸움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지겹고 부질없는 싸움이다.
하지만 이제 와서 나는 그 싸움을 멈출 수가 없다. 시지프스의 신화의 덫에 걸린 것이다.
나는 매일 아무 목적 없이 외로움의 바윗덩이를 산꼭대기로 밀고 올라간다. 그러나 허사가 되어버린다.
바윗덩이는 또다시 아래로 굴러떨어지고 나는 다시 밀고 올라가야 한다. 왜 이따위 짓을 하는가?
하지만 나는 한마디만 덧붙이고자 한다. 시지프 봇?
게는 그것은 영겁의 형벌이었고 그래서 괴로웠겠지만 내게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왜냐하면 그것은 남에게서 받은 형벌이 아니라 나 스스로 택한 것이기 때문이다.
문학이 형벌이라 할 때 더욱 그렇다.
그 협궤열차는 내게 잊지 못할 동경의 세계를 가르쳐 주었다. 그날 순환여행에서 돌아와서도
나는 '그런 곳에서 살고 싶다'는 꿈을 쉽사리 버릴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실현될 수 없는 꿈이었다.
게나 조개나 바닷새가 아닌 한 나는 서울의 '노예선'에 승선하고 있어야 한다.
그뒤 나는 방황을 하다가 그녀의 셋방에 기어들어가 이상한 형태의 동거인이 되고 말았다.
나는 열심히 글을 썼으며 '돈황(敦煌)'이니
'누란(樓蘭)'이니 하는 비단길 위의 도시국가들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눅눅하게 습기가 차고, 채광이 되지 않은
그 방에서의 동거생활은, 그러나 뜻이 같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왠지 동서(同棲)생활이라고 하는 편이 좀더 정확한 표현 일 듯 싶다. 우리는 함께 거주하고 있었다기보다 함께 서식하고 있었다.
우리는 그 어두운 방에 아예 틀어박히다시피하고 지냈다."
나 ?<누란의 사랑>이라는 소설에서 이와 같이 쓰고 있다.
인간의 꿈은 때때로 너무 쉽게 이루어지는 수가 있다. 내가 줄곧 서해안의 황량한 설경에 마음이 사로잡혀 있어서였을까.
어느날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알리는 공고가 나붙었다.
숨통이 막히는 10평짜리 아파트와 이 지구라는 별이 결국은 곤충들의 세계가 될지 모른다는 견해를 뒷받침이라도 하듯
기승을 부리는 바퀴벌레들을 떠날 기회가 온 것이다. 그리고 나는 협궤열차를 매일 만난 것이었다.
그리하여 남동(南洞), 소래(蘇萊). 달월(達月), 군자(君子), 고잔(古棧), 야목(野牧), 어천(漁川) 같은 수인선 역이름들을 만나고,
소음 속에서도 하루에 세번씩 좁은 레일을 밟고 경적을 울리는 열차의 소리를 듣는다.
하기야 정확히 자리잡고 이 삶의 고단한 몸을 눕힐 곳은 아무도 없는, 노을과 갯벌만 있는 곳은 아니다.
그러나 가까이에 그런 곳들이 있었다. 나는 외로움을 황량한 공간에서 반추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곳까지 온 것이어다.
내 소설에서도 지적되는 바와 같이 나는 황폐하게 버려져 있는 어떤 곳을 얼마나 동경해왔던가.
그래서 의식 속에서나마 그런 곳을 얼마나 헤매왔던가.
이곳을 제2의 고향으로 삼으리라.
진눈깨비가 질척질척 내리던 날, 새로운 터전에 짐을 부렸다.
짐이라야 낡은 책꾸러미가 거의 전부였다. 새로운 생활을 계획한다는 의미에서
서울에서 쓰던 허섭쓰레기 생활도구들을 다 버리고 작은 픽업트럭의 바닥에도 허술히 깔리는 짐이었다.
그왜 눈은 천지를 뒤덮으며 이 강산에 내렸다. 그리고 안개는 지척을 분간할 수 없이 도시를 애워쌌다.
새로운 고향을 만들기 위해서는그에 합당한 통과제의가 필요한 痼歐? 그로부터 나는 더욱 본격적으로 헤매다니기 시작했다.
첫해 겨울의 눈과 안개를 지나 춘, 하, 추, 동, 서해의 흐린 바다가 다가오는 곳에 또한 눈물겨운 섬들이 있었다.
통통배가 들어오는 포구의 뱃사람들 주막집, 외로운 사람들이 모여드는 포장마차,
뜨내기 노동자들이 묵고 있는 '함바'집에는 내 앓고 있는 술이 있었다.
나는 스스로 자멸파(自滅派)임을 자처하는 친구와 인생과 예술과 술을 이야기하며 주로 헤매다녔다.
세고비아와 로드리게스를 따르고 연극에도 몰두했던 그는 소설을 공부하고 있었다
"그 사람, 첨에는 어떻게 된 사람 같았어. 아침부터 혼자 멍하니 앉아 있곤 해서."
그를 향해서 '함바'주인은 말했다.
그 밖에도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 사이에서 나도 자멸파의 한 사람으로 위치를 굳히고 있었다.
이런 헤맴--어울림의 분위기를 누군가는 '그 시궁창'이라고도 표현한다.
모두들 자신들이 왜 아무런 연고도 없는 이 도시에 와서 헤매다니는지 알 수 없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떠나고 나는 아직 남았다. 그 언제였던가.
협궤열차를 같이 타고 가면서 내가 '이런 곳에서 외롭게 외롭게 살았으면' 하는 환상을 가졌을 때,
내 동행이었던 그녀는 딸아이와 함께 이곳을 떠났다.
나는 16평짜리 아파트에 홀로 남아 있다. 그리고 죽음에 관한 시를 쓴다.
시인이 되어 꼭 10년 동안은 시만을 썼고, 그뒤 소설가가 되어 꼭 10년 동안은 소설만을 썼고
그리고 다시 이제는 시와 소설을 함께 쓰면서, 그러고 보면 나는 10년 동안의 주기로 삶의 궤도를 바꾸는 것인가.
오늘도 협궤열차는 다니고 있다. 그 흔들리는 모습에서 한 편의 시를 쓴다.
저놈의 협궤 열차 아직도 다녀 헤어진 아내가 가 있는
딸애가 타고 왔다가 가는 협궤열차에 흔들리는 삶
꼭 유령 같다니까 아니 강시 같다니까
금방 무덤에서 나온 듯
도시에 나타나 어 저게 저게 하는 동안
뒤뚱뒤뚱 아마 고대공룡전(古代恐龍展)으로 사라진다니까
거무튀튀한 몸통뼈 안에 그러나
흔들리는 삶
아직 살아서 뒤척이는 꿈
날품팔이 아낙네의 질긴 사랑
나도 그래야 한다. 삶 찢기도록
사랑해야 한다.
살아 있음의 질긴 몸뚱이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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